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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북방 르네상스

북방 르네상스(북방 르네상스, 란: Noordelijkerenaissance영어: Northern Renaissance)는 몇 안 되는 북부 유럽에서의 르네상스 운동을 말하며 넓은 의미로는 이탈리아 이외의 유럽 르네상스 운동 전체를 일컫는 미술사 용어.

 


1450년 말까지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이탈리아가 아닌 유럽 국가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운동은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그 결과 "독일 르네상스", "프랑스 르네상스", "잉글랜드 르네상스", "저지국가 르네상스", "폴란드 르네상스" 등 각국에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예술운동이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이탈리아 예술의 가을 궁정을 맞아 막대한 비용을 들여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을 축조해 프랑스 르네상스의 계기를 마련했다. 15세기의 헤스, 16세기의 앤트워프와 같은 당시 경제중심도시와의 교역은 저지국가들과 이탈리아 양쪽에 큰 문화교류를 가져왔다. 그러나 저지대 국가들에서는 예술, 특히 건축 분야에서 후기 고딕의 영향이 여전히 컸고 화가들은 이탈리아 회화를 본받아 시작했지만, 반면 바로크 시대가 되기 전까지 후기의 고딕 양식에 빠져들지 못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치 체제가 중앙 집권한 것도 있고 이탈리아·르네상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자신의 르네상스가 발전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독립도시 국가들이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앙, 서유럽에서는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북방 르네상스는 16세기 종교 개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내외 모두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랜 갈등이 저지국가 르네상스 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원래 서유럽 북부의 이탈리아보다 봉건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유럽 경제는 과거 천년간 서유럽 지배를 하고 있었지만, 르네상스의 시작과 때를 같이해 쇠퇴해 간다. 쇠퇴의 원인은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전염병의 영향도 있지만, 물물 교환 무역에서 화폐에 의한 무역 전환, 농노제의 해소, 봉건 제후의 도시 국가 지배를 대체 군주제에 의한 국민 국가의 성립, 화약을 이용한 무기 등 새로운 군사 기술에 의한 봉건 군대의 불활성화 농업 기술·기법의 발달로 농업 생산성 향상 등 여러 이유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봉건 쇠퇴가 서유럽의 르네상스 문화에서 문화, 사회, 그리고 경제의 새 장을 연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서유럽의 르네상스 운동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약화와 함께 활발해졌다. 봉건완만한 죽음은 주교와 수도원 등이 장원영주로 봉납받는 대신 그 장원 사람들을 보호하는 오랜 관습 노후도 가져온다. 그 결과, 15세기에 교회에 의지하지 않는 교인들 자신에 의한 상조 조직등도 볼 수 있었다.

이런 다양한 사회 변화 속에서도 휴머니즘의 침투가 가장 중요한 르네상스기의 미술 음악 과학 발전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예를 들어 저지국가 출신의 사제인문주의자 디지델리우스 에라스무스는 북유럽의 인본주의 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고전적인 인본주의와 당시 증대된 각종 종교문제와의 융합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 세기 전이라면 교회에서 금지가 되어 있었다 예술의 표현기법이 이 시대가 허용되고 장려되기도 했던 것이다.

르네상스가 단기간에 전 유럽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활판 인쇄 기술이 발명되어 퍼져 간 탓도 크다.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욕망은 과학 연구를 촉진하고 정치 사상을 확산시키며 북유럽의 르네상스 운동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활판 인쇄기의 도입은 모국어 혹은 그리스어, 라틴어로 쓰여진 고대 문서나 새로 출판된 책을 접할 기회를 증대시켰다. 또한 성경이 널리 자국어로 번역된 것이 개신교 종교개혁의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북방 회화

 

로베르토 캄핀, 얀 반 에이크, 로히아르 반 데르 베이당, 플랑드르파 화가의 북방사실주의 그림은 이탈리아에서 높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북방회화와 이탈리아 회화의 상호 영향은 15세기 말까지 거의 없었다. 15세기에 두 지역간 빈번한 문화적 예술적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500년부터 1530년까지의 앤트워프 매너리즘(en:Antwerp Mannerists, 연대적으로는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시기와 겹치지만 관련이 거의 없다) 작가들이 저지국가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 화가이자 판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이탈리아로 두 차례 여행하면서 판화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듀러는 이탈리아에서 본 르네상스 예술의 영향을 받아 귀국했다. 타 이탈리아 이외의 중요한 화가에게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아버지), 프랑스 화가 장 푸케 등 당시 북방에서는 주류였던 고딕 양식의 화가들과 저지국가 화가 히에로님스의 보스, 저지국가 화가 피터 브뤼겔처럼 고도로 자신의 예술을 펼쳐 화가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스타일은 차세대 화가들도 활발히 모방하면 된다. 16세기 북방 회화 작가들은 점차 로마에 주목하였고, 실제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을 자신들의 예술로 포착하여 로마니즘(en: Romanism(painting)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활약했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후반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매너리즘 양식은 북방 회화 작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 것들이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와 수많은 고대 예술품은 북방의 예술가보다 이탈리아의 예술가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 부흥이라는 주제를 많이 가져왔다. 15세기 독일과 저지국가의 유명 회화작품에서는 고대예술의 영향은 찾아볼 수 없고 중세 전통 종교화가 많다. 당시 북방 예술 중 특히 유명한 것이 제단에서 휴대 가능한 것부터 매우 큰 것까지 제작되었다. 날개를 가진 제단은 교회력에 있어 정해진 특정한 날마다 개폐된다. 16세기가 되면 북방에서도 이탈리아에서 신화와 역사를 소재로 한 미술품이 자주 생성된다. 그러나 북방 르네상스 화가들은 새로운 소재를 찾아 풍경화와 풍속화 등에도 진출했다.


북부유럽으로 파급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 스타일은 각 지역성에 맞게 변화해 그 땅에 독자적으로 적응해 갔다. 잉글랜드와 북부 저지국가들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종교 대화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당시 튜더 왕조 잉글랜드는 뛰어난 궁중 예술가가 있었지만 초상화 회화는 극히 일부 상류층에만 퍼졌을 뿐이다.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초빙된 후기 매너리즘 양식의 화가 로소 피오렌티노의 영향으로 퐁텐 브로파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전통적인 프랑스 회화로 회귀하고 있다. 16세기 말에는 할렘에 모인 카렐 반 만델과 헨드릭 홀츠케우스들의 예술가가 플랑드르에 북방 르네상스에 이은 '북방 매너리즘'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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