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독일어: Bauhaus)는 1919년 바이마르 공화정기에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공예, 사진, 디자인 등을 포함한 미술과 건축에 관해 종합적으로 교육한 학교로 그 흐름을 이어가는 합리적이고 기능주의적 예술을 지칭하기도 한다.쓸데없는 장식을 없애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원류가 된 교육기관이며, 활동의 결과로 현대사회의 "모던"한 제품 디자인의 기틀을 마련했다. 디자인의 합리성 때문에 폭넓은 분야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미쳤으며,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표준 디자인으로 채택되고 있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축의 집을 뜻한다. 중세 유럽의 건축 장인 조합인 바우휴테(Bauhüte, 건축의 오두막)라는 말을 발터 그로피우스가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개요
세계 최초로 '모던'한 디자인의 틀을 확립한 미술학교이다. 학교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기까지 14년간이지만, 당시 유례없는 선진적인 활동은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모더니즘 건축' '20세기 미술' 항목 참조).19세기까지의 장식적인 역사 건축과는 달리 바우하우스 예술가들이 만든 디자인은 매우 합리적이고 심플한 디자인이어서 기계적인 대량생산에 적합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제품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흐름 속에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기법도 파생을 거듭하며 폭발적인 확산을 보여 갔다.
현대까지 콘크리트제 건축물이나 IKEA 등의 보급품 가구의 디자인, 유저 인터페이스의 그리드 레이아웃이나 플랫 디자인 등 다수의 제품에 바우하우스와 같은 방법이 사용되어 오고 있다. 그 외, 인터넷 사회에서, SNS등에서 다수 투고되고 있는 사진의 셀카·콜라주등도, 바우 하우스가 기원이 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활용은 미디어 아트에도 영향을 주어 현대의 디지털 컨텐츠 제작 수법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레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블록 완구도 존재한다. 따라서 바우하우스가 발명한 합리성을 추구한 디자인은 현대인이 의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혁
전사
바이마르 대공 빌헬름 에른스트는 벨기에 건축가로 아르누보에 조예가 깊은 앙리 반 데 베르데를 바이마르에 초빙했다. 1902년 베르데는 사설 공예 세미나를 설립해 1908년 대공립 미술공예학교로 발전했다.1911년에는 베르데 설계에 의한 공예학교 교사가 세워졌다.
반 데 베르데는 쾰른에서의 독일공작연맹전(독일어판 영어판)(1914년)에서 영국 아츠 앤드 크라프츠 운동의 영향을 받아 규격화를 중시한 독일공작연맹의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충돌하여(독일어: Typenstreit규격화 논란) 1915년에 독일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공예학교를 발터 그로피우스에게 맡겼다.
바이마르에서의 설립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독일혁명(1918년 11월 3일 - 1919년 8월 11일)이 발발.독일제국이 붕괴하고 대공의 통치가 끝나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성립했다. 1919년 공예학교와 미술학교가 합병해 국립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설립(베르데 설계의 옛 공예학교 교사 사용).초대 교장으로 그로피우스가 취임했고 그해 바우하우스 창립 선언이 나왔다(참고로 선언 표지는 리오넬 파이닝어의 사회주의 대성당). 선언문에서 그로피우스는 "예술가와 장인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계급을 분단하는 오만한 기운을 없애, 장인의 새로운 집단을 만들자!」라고 호소했다.
예비과정을 담당했던 요하네스 이텐의 방침에서 초기의 교육내용은 합리주의적(기능주의적)인 것과 표현주의적(신비주의적, 예술적, 수공업적)인 것을 혼합했다.
1922년 소련의 고등예술학교 부프테마스(1920년~1930년)에서 초빙한 바실리 칸딘스키가 러시아 아반가르드의 구성주의적 조형교육을 시작한 이후 그로피우스는 네덜란드의 데스테일(피에트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와 테오 판 두스부르크의 요소주의)에 영향을 받아 좀 더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사고를 취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로피우스와 요하네스 이텐 사이에 갈등이 생겨 1923년 이텐이 바우하우스를 떠났고, 후계자로는 헝가리를 망명한 모호리 나지 라슬로가 취임, 예비과정을 맡았다. 그 결과 합리주의·기능주의가 바우하우스의 중심적인 교육경향이 되어 갔다. 이것은 공업디자인과 대량생산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데사우 이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는 폐쇄되었다가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시립 바우하우스 데사우'가 되었다.데사우의 교사는 그로피우스의 설계에 따른 것으로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작으로 각국에 소개됐다. 현대적 감각으로 볼 때 딱히 특필할 점은 없으나 당시로서는 최첨단 건축디자인이었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 교장에서 물러났고 그로피우스의 후계자로는 한네스 마이어가 지명됐다.
바이마르가 독일 고전주의의 영향이 깊은 역사 깊은 문화도시였던 것에 비해 당시의 데사우는 융커스(항공기 메이커)의 기업 성시(城下町)의 신흥공업도시였기 때문에 이전지로 선택되었다.
무테지우스의 계보에 오른 마이어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바우엔'(Bauen, 건축, 구축)을 주창하여 모든 것을 규격화, 수치화, 계량화하고 합목적성, 경제성, 과학성을 철저히 중시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독일 표현주의적 심미성은 사라지고 조형의 호칭은 '미' 대신 '형성'(Gestaltung) 마이어의 수완으로 바우하우스는 처음으로 흑자를 낳아, 국제적인 평가가 높아져, 동교의 디자인 활동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1929년 6월 마이어의 후원으로 바우하우스 내에 독일 공산당 세포라는 동호회가 결성됐다.마이어가 공공연한 공산주의자여서 더욱 바우하우스는 나치 등 우익세력에 적대시당한다.
1930년 마이어는 해임되고 루트비히 미스 반데르 로에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베를린 이전·폐교
1932년 데사우 학교는 폐쇄되고 수도 베를린으로 이전하면서 사립학교가 되었다.미스 반데르 로에의 방침은 마이어의 바우엔을 계승하면서도 정치색을 불식하는 것이었다.
1933년에는 나치에 의해 폐교되기 전에 미스 반 델 로에에 의해 해산되었다.
미스 판 델 로에는 미국으로 망명.모호리나지 라스로도 국외로 이동하고 있는 등 국외로 활동의 장이 이동하게 되었다.
바우하우스 관계자와 나치의 관계가 똑같지 않아 강제수용소의 설계 건설에 협력한 사람이나 강제수용소에서 옥사한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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